Special Reissue
Italy Art Rock (1)
재발매와 함께 살펴보는
고대의 화려한 전통과 유물을 간직하며 현대의 최첨단 패션과 유행을 잘 융합시키고 있는 이태리는 유럽 대륙에서 지중해 쪽으로 장화처럼 뻗어 나와 있는 반도 국가다. 수도는 로마, 인구는 5,970만명이다.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면적은 301,338㎢로 한반도의 1.5배에 해당한다. 주요 도시로는 로마와 밀라노, 나폴리가 있으며 사용하는 언어는 이태리어, 종교는 가톨릭으로 전 국민의 98%가 가톨릭신자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태리는 로마제국의 찬란한 역사와 르네상스의 화려한 꽃을 피운 곳으로 줄리어스 시저 등이 활약한데 이어, BC 27년 아우구스투스가 왕위에 오른 것으로 시작된 로마 제국은 그 뒤 아프리카 북부는 물론, 중동과 영국에까지 손을 뻗치는 큰 제국을 이루었다. 4세기 말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세계 종교로 전파시켰다. 15세기에는 높아진 시민 의식과 귀족들의 비호로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으며, 5세기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분열된 국토는 1861년에야 통일을 보았다. 1,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승전국과 패전국의 자리에 서게 됐으며, 2차 대전 뒤에는 자동차 공업, 패션 산업, 관광 등으로 경제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공업이 발달해 부유한 북부 이태리와 지중해를 중심으로 농업과 어업이 주를 이루는 가난한 남부 이태리가 공존하고 있다. 이태리는 4계절의 변화가 분명하지만,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기후보다 약간 덥다. 그러나 북부지역은 아페니뇨 산맥의 영향으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여름의 평균기온은29℃, 겨울의 평균 기온은 9℃정도로 온난하다.
칸초네는 프랑스의 샹송, 남미의 깐시옹과 같은 어원으로 ‘노래’를 의미한다. 지금은 이태리에서 부르는 노래를 총칭하지만, 그 시작은 나폴리였다. 우리가 학창시절 배웠던 ‘O Sole Mio’, ‘Santa Lucia’와 같은 이태리를 대표하는 가곡들은 모두 나폴리에서 나온 곡들이고, 이렇게 나폴리에서 불리는 노래를 통틀어 ‘칸초네 나폴레나타(Canzone Napolenata)로 불렀고, 줄여서 ‘나폴레나’라는 장르로 정착되었다. 나폴레나가 가지는 특징은 동서양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항구도시에서 발생한 음악이었던 만큼 이태리 고유의 음악에 동양적인 색채가 가미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18세기에 일어난 벨칸토(belcanto) 창법이 결합되며 다른 음악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이태리인들만의 음악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노래들에는 오페라 가수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아닌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서민적인 면이 있었다. 칸초네의 주요 특징은 우선 멜로디가 밝고 아름다우며,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쉽다는 점이다. 내용도 비교적 단순하고 노골적인 사랑의 표현이 많아 낙천적인 이태리인들의 기질을 그대로 보여준다.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운 만큼 상업적인 요소가 많다는 점 역시도 중요한 특징가운데 하나다.
나폴리를 위주로 발생된 이태리의 칸초네가 전국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페스티벌의 영향 때문이다. 나폴리는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노를 저으면서, 또 그물을 끌어올리며 언제나 노래를 불렀다. 우리의 어부들 역시도 그렇듯이 이들도 한해에 한번 해상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행사를 가졌다. 제사를 지내는 우리의 풍습과는 달리, 이들은 자신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작의 노래를 바쳤는데, 이러한 행사는 ‘피에디그로타 페스티벌’이라는 정식 명칭이 붙으며 점점 발전하게 된다. 사실 민중들의 축제가 가요제의 성격을 띠며 발전하게 된 것은 정책적인 면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이 정치에 쏟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정식 가요제로 승격시킨 행사에는 이전과 달리 전문 작사 작곡가가 참여하며 전문적인 노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앞서 이야기한 ‘O Sole Mio’, ‘Santa Lucia’는 모두 이 피에디그로타 페스티벌을 통해 발표된 곡들이다. 피에디그로타 페스티벌은 지금도 ‘나폴리 칸초네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페스티벌의 성공이 가지는 파장은 대단했다. 낙천적인 성격에 노래 부르기와 놀기를 좋아하는 이태리인들의 성격에 그대로 부합되며 비슷한 행사가 하나 둘씩 생겨나게 되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산레모 페스티벌’은 그 가운데 대표적인 행사라고 할 수 있겠다.
산레모 페스티벌이 개최된 데에는 두 가지의 커다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2차 대전에 의해 패망한 이태리 국민들의 관심을 한군데로 모으는 데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꽃이 유명하긴 했지만 조그만 도시에 불과했던 산레모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들면서 경제적인 수익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의도야 어찌 되었던지 1953년 처음 열린 산레모 가요제는 1960년대로 접어들며 비약적인 발전을 해 나가게 된다. 1960년대 이후 이태리 대중음악의 발전은 산레모를 통해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모든 가수들은 산레모 무대를 통해 성공하길 바랐다. 산레모 가요제에서의 입상은 바로 그해 이태리 내에서 최고 가수로의 등극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점차로 해외의 관심도 높아지면서 해외시장의 초석을 다지는 기회도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이태리의 아트락 그룹들 가운데에서 우리에게도 많은 소개가 되어 친숙한 뉴 트롤즈(New Trolls)나, 데릴리움(Delirium), 에퀴페 오딴다콰트로(Equipe 84), 포르뮬라 뜨레(Formula 3)와 같은 그룹들도 그 시작 당시에는 모두 산레모 가요제를 통해 소개된 그룹들이다.
락 그룹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래도 가요제의 성격에 맞는 음악을 준비하는 것이 입상권내에 들 가능성이 많았을 것이다. 산레모 가요제에 참가하는 락 그룹들의 레퍼토리는 의식적으로 칸초네에 바탕을 둔 음악들이 대부분이었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랑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았다. 결국 이들은 ‘러브 락(Love Rock)’이라는 별칭으로 소개되면서 또 하나의 줄기를 만들어냈다. 물론 페스티벌의 성격상 이들에게 수상의 영광이 돌아가는 일은 없었지만, 가장 대중에 가까이 있는 행사를 통해 밴드들이 얻을 수 있는 홍보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우선 1967년에는 [Terra In Bocca]의 라이선스 발매로 국내에도 친숙한 지간띠(I Giganti)가 ‘Proposta’라는 곡으로 참가했고, 다음해인 1968년에는 ‘Da Bambino’로 참가했다. 이 해는 국내 올드 칸초네 팬들에게 사랑 받았던 마리사 산니아(Marisa Sannia)의 ‘Casa Bianca’가 금상을 받은 해 이기도 하다.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의 ‘Sailing’에 이태리어 가사를 붙인 ‘Volando’로 유명한 딕딕(I Dik Dik)은 1969년 ‘Zucchero’라는 곡으로 또, 1971년에는 ‘Ninna Nanna (Cuore Mio)로 참가했다. 특히 나다(Nada)의 ‘Il Cuore E'Uno Zingaro’와 리키와 포베리(Ricci E Poveri)의 ‘Che Sara’로 대표되는 1971년의 산레모 페스티벌에는 우리 귀에도 친숙한 그룹들이 대거 등장했다. 에뀌뻬 오딴다콰트로는 ‘4/3/1943’으로(이 곡은 같은 해에 루치오 달라가 불러 3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포르뮬라 뜨레는 ‘La Folle Corsa’로, 뉴 트롤즈는 ‘Una Storia’로 각각 참여했다. 니콜라 디 바리(Nicola Di Bari)의 ‘I Giorni Dell'Arcobaleno’가 대상을 받았던 1972년에는 데릴리움이 ‘Jesahel’이라는 곡을 발표했다.
락 그룹들이 이러한 대중음악 페스티벌에 참여했다는 점은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1960년대에 자국 내에서 인기를 모으던 비트 그룹의 세력이 점점 약해졌다는 것은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종주국의 음악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추종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점을 뜻하는 것이었다. 산레모 페스티벌 역시 1950년대에 시작한 행사인 만큼 가수와 작곡가가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던 시절에서 창작능력이 있는 뮤지션들을 수용함으로서 더욱 내실 있는 행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또 이들 그룹 이외에도 초기 이태리의 젊은 노래운동을 주도했던 작곡가 루치오 바띠스티(Lucio Battisti)와 작사가 모골(Mogol)의 보이지 않는 활약 역시도 산레모 페스티벌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번져나갔다. 이들 두 젊은이의 팀워크는 이후 소규모 레코드사인 누메로 우노(Numero Uno)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락 밴드들이 산레모 페스티벌과 같은 자국 내의 대중음악 페스티벌 참여와 동시에 미국의 우드스탁을 본 딴 페스티벌들이 이태리 내에서 본격적으로 생겨나게 된 것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이다. 좌익정당들이 그들의 사상을 주입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페스티벌이었던 ‘프로레타리아 청년들의 축제(Feste Del Proletariato)’는 이태리에서 최초로 열린 본격 락페스티벌이고, 초기 정치적인 색깔에서 벗어나 해를 거듭할수록 진정한 의미에서의 음악을 위한 페스티벌로 발전해 나간다. 인기의 유무에 관계없이 실력과 창의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는 이러한 페스티벌을 통해 수많은 아트락 그룹들과 아방가르드 그룹들이 대중 앞에 선을 보일 수 있었고, 그들로 인해서 1970년대 초반 이태리의 락씬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로마에 위치한 라이브 클럽 ‘파이퍼 클럽(Piper Club)’은 후(The Who)나 스몰 페이시스(Small Faces), 스펜서 데이비스 그룹(Spencer Davis Group), 프로콜 하룸(Procol Harum)과 같은 해외의 그룹들이 공연하던 공연장이었고,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가 처음으로 이태리에서 공연을 펼쳤던 무대기도 하다. 파이퍼 클럽에서 주최한 새로운 페스티벌 ‘콘트로칸초니시마(Controcanzonissima)’는 전성기의 아트락 그룹들을 모두 흡수하여 이태리 최고의 아트락 페스티벌을 1973년에 개최했다. 콘트로칸초니시마는 합성어로 ‘기존 대중음악에 가장 강력히 대항하는’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페스티벌 다방가르디아(Festival D'Avanuardia)는 1971년부터 1973년까지 매년 6월에 개최되었던 페스티벌이다. 1971년에는 비아레죠에서, 1972년에는 로마에서 그리고 1973년에는 나폴리에서 각각 개최되었던 이 무대를 통해서 역시 그동안 잘 알려지지 못했던 자국 내의 유능한 신진 뮤지션들이 소개되었다. 이태리의 뮤지션뿐만 아니고 해외의 아티스트들도 대거 함께 했던 페스티벌인 까닭에 대외적으로도 가장 큰 영향을 행사했던 페스티벌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련의 페스티벌을 통해 등용된 그룹들은 이후 최고의 음악성으로 인기까지를 겸비한 이태리를 대표하는 밴드들로 자리잡았다. 바로 심야 방송을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방코(Banco), 오잔나(Osanna), 뉴 트롤즈, 레 오르메, 뽀르뮬라 뜨레, 그리고 P.F.M. 등이 그들이다. 이들 대부분이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 데뷔한 그룹들이지만,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그룹들이 많을 정도로, 전성기 이들의 인기는 자국인 이태리에 국한되지 않고 충분히 세계적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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