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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rl Jam

멈추지 않는 시애틀의 심장

이태훈·p.66-67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장수(長壽) 밴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펄 잼의 행보가 새삼 놀랍기만 하다. 사실 펄 잼은 단명하기 쉬운 락 밴드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췄다. 처음 밴드의 인기가 스스로 발화한 것이 아닌 연쇄 작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데뷔 앨범이 엄청나게 성공했다는 것, 프론트맨에게 필요 이상으로 관심이 집중된 밴드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하나의 조건만 해당하고도 단명한 밴드들이 부지기수였지만, 펄 잼은 23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오면서 여전히 건재하게 살아남았다. 그 장수의 비결은 단순 명료하다. 데뷔 이래 줄곧 자신들의 음악적 뿌리와 신념을 잃지 않는 항상성, 초심의 애티튜드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런지 열풍이 쇠퇴한 이후 네오 펑크와 인더스트리얼락, 포스트그런지와 뉴메틀이 메인스트림을 대표하는 장르로 급격한 세대교체를 보일 때도 펄 잼은 그러한 영향권으로부터 항상 독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은 U2와 R.E.M.과 같은 대(大)밴드조차 시류를 의식한 괴작을 발표했던 혼돈의 시기였음에도, 펄 잼은 4집 [No Code]를 기점으로 오히려 점점 주류로부터 멀어지는 듯한 음악성을 추구하기도 했다. 사실 그때가 펄 잼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이룩한 시기였다. 경쟁자들과의 싸움을 통해 승리를 쟁취하기보다는 닐 영(Neil Young)과 같은 존경하는 선배 뮤지션의 전통을 계승하는 목표에 주력함으로써 밴드의 사명감을 확립했다. 즉, 펄 잼의 족적이 그런지락에서 보다 거시적인 영역인 아메리칸 하드락의 역사로 편입되는 발전적이고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펄 잼 중기의 음악이 비상업적인 방향으로 전개된 것은 소속 레이블과의 마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한 상황이 맞물려, 7집 [Riot Act]까지는 상업적인 성공을 기대하는 레이블의 요구에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하면서 어쩌면 본의 아니게 비타협적인 성향이 두드러진 시기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소니 산하 에픽(Epic) 레이블과의 노예 계약을 정리하고 완성한 8집 [Pearl Jam]이 밴드의 이름을 의욕적으로 내세운 동명 타이틀이었다는 것과 초기작들의 에너지와 활력을 회복한 인상적인 컴백 앨범이었다는 사실은 그 명백한 전후 관계를 암시했다. 나아가 전성기 대표작들을 함께 작업했던 명 프로듀서 브렌던 오브라이언과 다시 재회한 전작 [Backspacer]는 13년 만에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탈환하면서 밴드의 완전한 회춘을 달성했다.

[Lightning Bolt]는 통산 10번째 정규 앨범으로써 매우 상징적인 결과물이다. 프로듀서는 역시 브렌던 오브라이언이 담당했다. 스트레이트한 질주감으로 무장한 ‘Getaway’와 ‘Mind Your Manners’, ‘My Father’s Son’으로 이어지는 초반부는 펄 잼의 근작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가장 치열한 음악성을 선보였던 2집 [Vs.]에 대한 향수를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앨범은 ‘Black’의 전통을 이어받은 미드 템포의 발라드 ‘Sirens’를 기점으로 다소 힘을 조절하는 유연한 전개를 보인다. 그런지와 하트랜드 락이 조우하는 ‘Lightning Bolt’와 제프 에이먼트의 리드미컬한 베이스 라인이 전개를 주도하는 ‘Infallible’, 과감한 사운드의 여백을 사이키델릭한 기타 리프가 관통하는 ‘Pendulum’과 블루스에 대한 오마주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낸 ‘Let The Records Play’, 블루그래스 풍의 유유자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Future Days’ 등 작곡 과정에서 에디 베더에 편중되지 않고 멤버들의 다양한 취향을 포용하고자 했던 의도가 잘 반영된 넓은 음악적 지표를 드러낸다. 흥미로운 것은 앨범이 후반부로 갈수록 점차 그 강도와 볼륨이 낮아지는 완만한 기울기를 보인다는 점인데, 이를 통해 에너지와 활력이 넘쳤던 밴드의 초기 시절부터 포크 장르에 탐닉한 에디 베더의 최근 솔로 활동까지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엿볼 수 있다. 요컨대, 펄 잼의 지난 23년 간의 발자취를 순차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펄 잼은 너바나(Nirvana)의 라이벌로서 그리고 그런지의 영웅 밴드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내려놓은 지 오래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펄 잼은 화려한 락 스타이기를 거부하고 닐 영과 같은 묵묵하고 건실한 그러나 고독할 수밖에 없는 뮤지션의 길을 숙명처럼 따라가고 있다. 닐 영의 음악 스타일이 아닌 가치관을 닮고 싶어 했던 밴드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는 아메리칸 락의 전통을 이어받은 펄 잼 식 락큰롤의 완성이다. [Lightning Bolt]는 그렇게, 이미 많은 것을 이룩한 노장 밴드가 자신의 의지와 신념대로 멋지게 늙어가는 가장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결과물이다.

LIGHTNING BOLT

원본 지면 (p.66-67)· 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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